미얀마이야기

이야기 스님의 미얀마 이야기 4.영웅

이야기스님 2024. 4. 3. 01:57

[아시아의 친구들_기획연재] https://blog.naver.com/foasia2002 

2023.11.30. 이야기 스님의 미얀마 이야기 4.영웅

“미얀마에서 영웅이나 위인은 누가 있나요?” 미얀마인 유학생에게 물어보았다.

“아노야타 왕, 짠씻따 장군, 어라웅민페야 왕, 마하반둘라 장군 … 아웅산 장군”

유학생이 말해준 위인들의 공통점이 바로 보인다. 한마디로 전쟁으로 나라를 세우거나,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거나, 다른 민족이나 나라를 침략하여 힘을 과시한 전쟁 영웅들이다. 미얀마는 군부의 나라로 무왕과 장군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기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식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 역시 과거 군사정부 시절 위인전집 속 인물을 보면 별반 다를것이 없다. 그렇기에 미얀마의 교육 과정을 착실히 이수한 학생의 답으로는 당연하다 할것이다. 그렇더라도 불교를 수호하는 나라로 자처하는 미얀마에서 역사 상 위대한 승려가 많음에도, 스님들을 위인으로 꼽지 않는 것은 왜일까.

과거 미얀마 땅에는 크게 3개의 민족이 있었다. 네팔-티벳에서 넘어온 퓨족은 미얀마의 중북부를, 태국 쪽에서 올라온 몬족은 중남부를, 그리고 미얀마의 서쪽으로 방글라데시 쪽에서 내려온 아라칸(라카인)족들이 주로 살았다. 이들은 모두 불교 문화 속에서 살았는데, 특히 퓨족은 부처님의 종족인 석가족의 후예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평화주의적인 삶을 살았다고 한다. 성년이 되기 전에 남여 모두 절에서 승려 생활을 했고, 사회적으로는 잔인한 형벌도구나 처벌도 없었다. 불교의 5계 중 살생하지 않는 계목을 예로 들자면, 사치품에인 비단의 경우 수많은 누에의 생명을 죽여 만들기에 비단을 비판했다고 한다. 역사 속에서 불교의 이상향과 같은 민족은 퓨족이었다고 말할만 하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민족도 중국 남조의 침략을 받아 학살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고, 그 결과 동티벳과 운남성 쪽에서 내려온 버마족이 미얀마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는 버마족의 아노야타 왕이 짠씻따 장군과 함께 몬족과 아라칸족들을 모두 복속시키면서 아시아의 불교를 수호하고 전파하는 중심 민족이 된다.

버마족의 최초 왕국을 아노야타 왕이 세우는 과정에 발생한 큰 모순이 하나 있다. 기존 권력인 타락한 불교 세력을 몰아내고 초기불교의 전통을 잘 전승하고 있는 몬족의 테라와다불교를 정신적 지주로 받아들인 과정이다. 아노야타 왕은 몬족이 불교 경전을 순순히 내주지 않자, 몬족을 정벌하고 강제로 불교 경전을 빼았았다. 비슷하게 아라칸족 또한 정벌하며 생전의 부처님 얼굴이라 믿어 큰 보배로 여기는 마하무니 불상 또한 빼앗아 온다. 버마족의 역사에선 자랑이 다른 민족의 역사에선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인류 역사에서 모순이란 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평화를 큰 가치로 삼는 불교를 정신적 지주로 삼기 위해, 살생과 폭력으로 경전과 불상을 빼앗아온 왕이 불교 수호국의 가장 큰 위인이 되고, 그 왕과 후대 왕 덕에 강성해진 버마족 왕국이 태국 아유타야 왕국의 절과 불상을 파괴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며 아유타야를 멸망시키고, 그 힘은 반대로 북쪽에서 내려오는 이슬람 세력을 막아내며 동남아의 불교를 수호하게 되고, 미얀마 군부의 최대 기획 수출품이라 하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미얀마는 불교 수행을 대표하는 나라가 되어 명상수행의 대중화를 가져오고… 그 반면에는 불교의 수호자로 자처한 군부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학살 당하고, 시민군의 근거지가 된 마을과 절은 잿더미가 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미얀마의 영웅. 왼쪽부터 아노야타 왕, 짠씻따 장군, 어라웅민페야 왕, 마하반둘라 장군

 

이런 모순 속에서 지금 미얀마인들은 정의를 되찾고 평화를 되찾아줄 영웅을 바란다. 세상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것이 영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태어나고 죽는 것을 피할 수 없고, 우주가 생성하고 소멸하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인류의 탐욕과 증오는 반복되고 그 속에서 영웅 역시 반복하여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처럼 미얀마는 영웅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그것도 모순 관계인 민족을 다 통합해야만 하는 큰 영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은 반대로 증오와 복수와 권력 투쟁을 잉태하고 만다. 오래지 않아 영웅은 죽고 다시 분열과 권력 투쟁과 학살의 비극이 뒤따른다.

영웅을 만들지 않는, 영웅이 필요없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그런 세상은 개개인이 세상을 보호하는 법인 "도덕적 양심과 수치심"을, 돈과 권력보다 그 어떤 주의(-ism)보다 더 큰 가치로 삼을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은 평화의 시기는 지나가고 점점 증오와 폭력의 시대로 변하고 있고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진정으로 우리를 보호하고 지켜주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얼마나 도덕적인 양심으로 부끄러함에 확고한가, 도덕적 수치심으로 악행을 두려워함에 확고한가이며, 이 두 가지 마음에 확고한 사람이 세상의 다수가 되었을 때 나를 지키고 남을 보호하게 되어 평화 세상이 찾아올 것이다.

소승불교 승려는 세상의 영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윤회 모순 속 세상의 법과 정의를 넘어 저 건너 세상으로 나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저 건너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필자는 소승불교 승려이나, 어린왕자 책에서 바오밥나무가 얼마나 위험한지 급박한 마음으로 경고했던 작가의 마음으로, 돈과 권력을 위해 양심도 수치심도 모르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는 이 세상을 경고하며 그러한 사람들이 힘을 더 키우지 않도록, "도덕적인 부끄러움에 확고한 양심은 나를 지키고 세상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악행을 두려워함에 확고한 수치심은 나를 지키고 세상을 보호하는 힘이니, 이 두 가지 마음을 꼭 지켜내고 키워야만 합니다."라고 급박한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이 세상에, 돈과 권력의 가치 보다, 도덕적 양심과 수치심을 삶의 소중한 가치와 지표로 삼아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수가 되어 영웅이 필요없는 세상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고통받는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하여지이다.
위험처한 모든 중생이 위험에서 벗어나 평안하여지이다.
슬퍼하는 모든 중생이 슬픔에서 벗어나 평안하여지이다.